배움의 자세.
타로마스터로서 강의를 시작한지 벌써 꽤 오랜 시간이 지났네요.
그 동안 많은 분들이 배우러 오셨고, 많은 분들이 배우고 가셨습니다.
그런데 그 많은 분들보다 더 많은 분들이 타로에 대해서 문의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분들 중에는
배움이란 것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고 오셨던 분들이 많았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배움의 자세에 대해서 이야기를 좀 해볼까 합니다.
타로를 가르치면서 가장 특징적으로 많이 연락이 오는 부류의 사람들은 역시 '사주'를 전문적으로
하시는 분들 입니다. 그런데 그 분들은 대체로 타로카드를 빨리, 그리고 쉽게 배우려고 하시는 경
향이 있습니다. 몇 가지 이야기를 하자면..
한번은 어떤 남자분이셨습니다.
남 : '영업에 사용할 타로카드를 배우고 싶습니다. 그거 한 두달이면 배울 수 있겠죠?'
타 : '영업에 사용하시려면 못해도 족히 1년은 배우셔야 합니다.'
남 : '그거 뭐 1년이나 배웁니까? 한두달이면 되죠.'
타 : '사주는 얼마나 배우셨습니까?'
남 : '그게 끝이 있나요. 몇 년 했지만 아직 멀었습니다.'
타 : '그럼 왜 타로는 두달이면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남 : '....'
그 뒤로 그 분은 연락이 없으셨습니다.
무엇인가를 배우려고 하면서 그것에 대한 기본적 이해도, 혹은 '인정'도 하지 않는다면 무엇을 배
울 수 있을까요? 그게 뭐 별거 있겠어? 라는 마음가짐으로 무엇을 배울 수 있을까요? 잘 모르겠습
니다. 저로서는..
다른 분도 있었습니다. 이 분은 여자분이셨습니다. 이분도 사주로 영업을 하고 계신 분이셨습니다
.
여 : '타로카드로 잘 맞출 수 있죠? 그거 배우는데 얼마나 걸려요? 두달이면 되나요?'
타 : '영업에 쓰시려면 못해도 1년은 배워야 합니다. 사주는 얼마나 걸리셨습니까?'
여 : '이정도 맞추는데 5년 정도 걸렸습니다.'
타 : '두달 배워서 사주로 맞추는 것 만큼 맞추길 바란다면 타로가 사주보다 더 쉽고 좋다는 거네
요?'
여 : '그건 아니죠.'
타 : '그럼 왜 사주는 몇년이나 배워야 맞출 수 있고, 타로는 몇개월이면 맞출 수 있는건가요?'
여 : '....'
그 뒤로 이분도 연락이 없으셨습니다.
제가 뭔가 다른 주장을 한 것도 아니고 이분이 스스로 하신 말씀을 그대로 돌려 드렸음에도 불구
하고 말을 잇지 못하셨습니다. 이 경우는 자신이 스스로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그 의미도 모른채
이야기 할 경우에 나타나곤 하는 현상입니다.
또 다른 이야기도 있습니다. 이분은 다른 선생님에게서 타로를 배우셨던 분입니다. 그리고 다른
방법론을 배우고 싶다고 오셨던 분이십니다. 저는 한국의(혹은 도제의) 참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지만 어쨌든 한 스승이 있고, 그 상태에서 다른 사람을 찾아 왔다는 것 만으로도 얼마나 용기가
가상한지 모르겠다며 기뻐하던 차 였습니다.
그리고 이 컵의 물 이야기는 대부분의 초급반 오리엔테이션때 다 하는 이야기 였습니다.
타 : '커피가 반쯤 들어있는 컵에 물을 마시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남 : '잘 모르겠는데요'
타 : '커피를 버리고 새로 물을 따라 마셔야 합니다. 이게 무슨 의미인지 아시겠습니까?'
남 : '네 알겠습니다'
라고 하고 그 분은 돌아가셨지만 그 뒤로 연락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들리는 소문은 이런 것이었
습니다.
'이미 배운 것은 커피고, 이제 가르칠 것은 물이래. 자기가 가르치는 것만 좋은거라나봐.' 라는
식의 이야기들 이었습니다. 이 이야기의 본질은 그것이 아니었습니다. 까짓거 '물을 버리고 오줌
을 받아라' 라고 한들 어떻습니까. 그게 중요한게 아니지 않습니까?
이 컵의 물 이야기는 또 사연이 있습니다.
타 : '커피가 반쯤 들어있는 컵에 물을 마시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여 : '마시든지 버리든지 해야죠'
타 : '그러실 수 있겠습니까?'
여 : '아니요.'
글세요.. 저에게 무엇을 바라는 건지 잘 모르겠습니다. 이 분은 그냥 돌려보냈습니다.
무엇인가를 배운다는 것은 자신이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그대로 유지하겠다라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배운다는 것은 곧 어떤 의미로든 변화를 의미하는 것이고 원래의 모습을 그대로 유지
하겠다는 생각이라면 배우지 않아도 됩니다. 더불어 그 장소에서 배우고 나서 그것과 자신이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비교한 뒤 어떤 것을 선택해도 늦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배우는 그 순간
조차도 자신의 원래모습을 놓지 않는다면 어떻게 배울 수 있겠습니까?
도교에는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스승을 찾아서 두 명의 제자가 왔고, 스승은 제자에게 무를 밭에 심으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무의 잎부분을 아래로 가게 심으라고 하고 자리를 떠나셨습니다.
그랬더니 한 제자는 스승의 말을 그대로 따랐고, 한 제자는 아무래도 이상하다 하며 무의 뿌리를
아래로 가게 했습니다.
스승이 돌아와서 뿌리쪽으로 심은 제자에게 하시는 말씀이 '누가 스승이고 누가 제자인지 모르겠
다. 너는 나를 가르치려 하니 돌아가라' 라고 했답니다.
수능 시즌이 지나고 나면 흔히 전교 1등이라던가 전국 1등이라던가 하는 학생들이 나와서 이야기
합니다. '교과서를 중심으로 예습 복습만 했어요. 과외는 안했습니다.' 라고 하는 이야기 이제는
식상하지만 정말 많이 들었었습니다. 그런데 궁금한건 왜 사람들이 '거짓말일거야'라면서 그 말을
따르지 않는지 모르겠다는 것입니다. 그 말이 정말 일수도 있고, 또 그들이 그 방법으로 성공했다
면 그것은 정말 정답일지도 모른다는 것입니다.
수 많은 사람들이 살 빼고 싶다고 말하면서 '조금먹고 운동하기' 라는 정답만 빼고 그 외의 모든
방법을 다 해보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어떤 의미로든 무엇인가 배움을 구하려고 하고, 그 사람이 그 분야에서 높은 위치에 올랐다면 그
의 방법을 따르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런데 자신이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놓지 않으면서 배울 수
는 없는 법입니다. 이미 가지고 있었던 내것과 새로 배운 것 중에 어떤게 더 좋은지의 판단은 다
배운 다음에 해도 늦지 않습니다.
불교에는 '무명' 이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이 단어의 의미는 '모른다' 입니다.
그런데 이 단어는 단지 '모른다'라는 것만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모른다면 왜 모르냐? 라는 질
문이 따라 붙습니다. 그것은 '모른다는 것을 모르기 때문에 모른다'입니다. 이 단어는 여기서 멈추지 않습니다.
'왜 모른다는 것을 모르냐?' 라는 질문이 또 따라 붙습니다. 그 답은..
'이미 알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모른다는 것을 모른다'
입니다.
무엇인가를 배우려고 할때 내가 '이건 아는거야'라는 생각이 들때 저는 '무명'이라는 단어를 다시
떠올리곤 합니다.
무엇인가를 배우려고 한다면 '아무것도 모른다'라는 겸손한 마음으로 배워야 합니다. 그렇지 않다
면 시간과 돈을 손해보는 것은 물론이고 그것을 배울 기회까지 잃어버리게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
다.
타로마스터 최정안.
타로마스터로서 강의를 시작한지 벌써 꽤 오랜 시간이 지났네요.
그 동안 많은 분들이 배우러 오셨고, 많은 분들이 배우고 가셨습니다.
그런데 그 많은 분들보다 더 많은 분들이 타로에 대해서 문의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분들 중에는
배움이란 것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고 오셨던 분들이 많았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배움의 자세에 대해서 이야기를 좀 해볼까 합니다.
타로를 가르치면서 가장 특징적으로 많이 연락이 오는 부류의 사람들은 역시 '사주'를 전문적으로
하시는 분들 입니다. 그런데 그 분들은 대체로 타로카드를 빨리, 그리고 쉽게 배우려고 하시는 경
향이 있습니다. 몇 가지 이야기를 하자면..
한번은 어떤 남자분이셨습니다.
남 : '영업에 사용할 타로카드를 배우고 싶습니다. 그거 한 두달이면 배울 수 있겠죠?'
타 : '영업에 사용하시려면 못해도 족히 1년은 배우셔야 합니다.'
남 : '그거 뭐 1년이나 배웁니까? 한두달이면 되죠.'
타 : '사주는 얼마나 배우셨습니까?'
남 : '그게 끝이 있나요. 몇 년 했지만 아직 멀었습니다.'
타 : '그럼 왜 타로는 두달이면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남 : '....'
그 뒤로 그 분은 연락이 없으셨습니다.
무엇인가를 배우려고 하면서 그것에 대한 기본적 이해도, 혹은 '인정'도 하지 않는다면 무엇을 배
울 수 있을까요? 그게 뭐 별거 있겠어? 라는 마음가짐으로 무엇을 배울 수 있을까요? 잘 모르겠습
니다. 저로서는..
다른 분도 있었습니다. 이 분은 여자분이셨습니다. 이분도 사주로 영업을 하고 계신 분이셨습니다
.
여 : '타로카드로 잘 맞출 수 있죠? 그거 배우는데 얼마나 걸려요? 두달이면 되나요?'
타 : '영업에 쓰시려면 못해도 1년은 배워야 합니다. 사주는 얼마나 걸리셨습니까?'
여 : '이정도 맞추는데 5년 정도 걸렸습니다.'
타 : '두달 배워서 사주로 맞추는 것 만큼 맞추길 바란다면 타로가 사주보다 더 쉽고 좋다는 거네
요?'
여 : '그건 아니죠.'
타 : '그럼 왜 사주는 몇년이나 배워야 맞출 수 있고, 타로는 몇개월이면 맞출 수 있는건가요?'
여 : '....'
그 뒤로 이분도 연락이 없으셨습니다.
제가 뭔가 다른 주장을 한 것도 아니고 이분이 스스로 하신 말씀을 그대로 돌려 드렸음에도 불구
하고 말을 잇지 못하셨습니다. 이 경우는 자신이 스스로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그 의미도 모른채
이야기 할 경우에 나타나곤 하는 현상입니다.
또 다른 이야기도 있습니다. 이분은 다른 선생님에게서 타로를 배우셨던 분입니다. 그리고 다른
방법론을 배우고 싶다고 오셨던 분이십니다. 저는 한국의(혹은 도제의) 참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지만 어쨌든 한 스승이 있고, 그 상태에서 다른 사람을 찾아 왔다는 것 만으로도 얼마나 용기가
가상한지 모르겠다며 기뻐하던 차 였습니다.
그리고 이 컵의 물 이야기는 대부분의 초급반 오리엔테이션때 다 하는 이야기 였습니다.
타 : '커피가 반쯤 들어있는 컵에 물을 마시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남 : '잘 모르겠는데요'
타 : '커피를 버리고 새로 물을 따라 마셔야 합니다. 이게 무슨 의미인지 아시겠습니까?'
남 : '네 알겠습니다'
라고 하고 그 분은 돌아가셨지만 그 뒤로 연락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들리는 소문은 이런 것이었
습니다.
'이미 배운 것은 커피고, 이제 가르칠 것은 물이래. 자기가 가르치는 것만 좋은거라나봐.' 라는
식의 이야기들 이었습니다. 이 이야기의 본질은 그것이 아니었습니다. 까짓거 '물을 버리고 오줌
을 받아라' 라고 한들 어떻습니까. 그게 중요한게 아니지 않습니까?
이 컵의 물 이야기는 또 사연이 있습니다.
타 : '커피가 반쯤 들어있는 컵에 물을 마시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여 : '마시든지 버리든지 해야죠'
타 : '그러실 수 있겠습니까?'
여 : '아니요.'
글세요.. 저에게 무엇을 바라는 건지 잘 모르겠습니다. 이 분은 그냥 돌려보냈습니다.
무엇인가를 배운다는 것은 자신이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그대로 유지하겠다라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배운다는 것은 곧 어떤 의미로든 변화를 의미하는 것이고 원래의 모습을 그대로 유지
하겠다는 생각이라면 배우지 않아도 됩니다. 더불어 그 장소에서 배우고 나서 그것과 자신이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비교한 뒤 어떤 것을 선택해도 늦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배우는 그 순간
조차도 자신의 원래모습을 놓지 않는다면 어떻게 배울 수 있겠습니까?
도교에는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스승을 찾아서 두 명의 제자가 왔고, 스승은 제자에게 무를 밭에 심으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무의 잎부분을 아래로 가게 심으라고 하고 자리를 떠나셨습니다.
그랬더니 한 제자는 스승의 말을 그대로 따랐고, 한 제자는 아무래도 이상하다 하며 무의 뿌리를
아래로 가게 했습니다.
스승이 돌아와서 뿌리쪽으로 심은 제자에게 하시는 말씀이 '누가 스승이고 누가 제자인지 모르겠
다. 너는 나를 가르치려 하니 돌아가라' 라고 했답니다.
수능 시즌이 지나고 나면 흔히 전교 1등이라던가 전국 1등이라던가 하는 학생들이 나와서 이야기
합니다. '교과서를 중심으로 예습 복습만 했어요. 과외는 안했습니다.' 라고 하는 이야기 이제는
식상하지만 정말 많이 들었었습니다. 그런데 궁금한건 왜 사람들이 '거짓말일거야'라면서 그 말을
따르지 않는지 모르겠다는 것입니다. 그 말이 정말 일수도 있고, 또 그들이 그 방법으로 성공했다
면 그것은 정말 정답일지도 모른다는 것입니다.
수 많은 사람들이 살 빼고 싶다고 말하면서 '조금먹고 운동하기' 라는 정답만 빼고 그 외의 모든
방법을 다 해보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어떤 의미로든 무엇인가 배움을 구하려고 하고, 그 사람이 그 분야에서 높은 위치에 올랐다면 그
의 방법을 따르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런데 자신이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놓지 않으면서 배울 수
는 없는 법입니다. 이미 가지고 있었던 내것과 새로 배운 것 중에 어떤게 더 좋은지의 판단은 다
배운 다음에 해도 늦지 않습니다.
불교에는 '무명' 이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이 단어의 의미는 '모른다' 입니다.
그런데 이 단어는 단지 '모른다'라는 것만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모른다면 왜 모르냐? 라는 질
문이 따라 붙습니다. 그것은 '모른다는 것을 모르기 때문에 모른다'입니다. 이 단어는 여기서 멈추지 않습니다.
'왜 모른다는 것을 모르냐?' 라는 질문이 또 따라 붙습니다. 그 답은..
'이미 알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모른다는 것을 모른다'
입니다.
무엇인가를 배우려고 할때 내가 '이건 아는거야'라는 생각이 들때 저는 '무명'이라는 단어를 다시
떠올리곤 합니다.
무엇인가를 배우려고 한다면 '아무것도 모른다'라는 겸손한 마음으로 배워야 합니다. 그렇지 않다
면 시간과 돈을 손해보는 것은 물론이고 그것을 배울 기회까지 잃어버리게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
다.
타로마스터 최정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