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조건
사람들은 보통 자신을 인간이라고 생각하고 사는 것 같다. 인간적이다, 혹은 인간성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곤 하며, 동물과는 다른 존엄을 가진 존재라는 인식들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하지만 정작 인간이란 무엇이며, 어떤 조건을 채웠을 때 동물과는 다른 인간이며, 동물과 인간이 실제로 어떻게 다른지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는 것 같다.
나는 동물-인간의 관계 이외에 인간-로봇의 관계를 하나 더 첨가함으로 오롯이 인간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그리고 어떻게 사는 것이 인간답게 사는 것인가에 대해서 정의를 해 보고자 한다.
동물-인간
동물과 인간의 차이는 무엇일까? 십 수 년간의 상담과 연구를 통해서 끝내 내가 도달한 결론은 인간과 동물은 실제로 그렇게 큰 차이를 가지지 않는 다는 것이었다. 다시 말해서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인간으로서의 삶 보다는 더 동물적인 삶을 살고 있다는 의미이다.
그렇다면 동물과 인간을 가르는 중요한 지점은 무엇일까? 그것에 대한 대답을 할 수 있어야 인간과 동물에 대해서 이야기를 할 수 있을 것이다.
흔한 주장은 보통 ‘언어’ 이다. 그러나 사실 여러 연구에 의해서 동물도 ‘언어’를 가진다는 것이 증명되었다. 다만 우리가 알아듣지 못할 뿐이다. (어떤 새들에게는 심지어 사투리까지 존재했다.)
그 다음은 ‘교육’과 ‘문화’였다. 하지만 이것 또한 유인원과 새들에게서 같이 존재한다는 것이 밝혀졌다.
그렇다면 인간과 동물을 가르는 가장 큰 차이는 무엇일까? 그것에 대한 대답은 자신의 ‘감정’(혹은 욕구)을 어떻게 컨트롤 할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동물에게서는 감정의 컨트롤을 볼 수 없었다. 그들은 자신의 감정의 흐름을 거스르지 않고, 자신이 원하는 것이 있으면 즉시 행동했으며, 분노나 슬픔 등을 그대로 표현했고, 그것은 바로 행동으로 이어졌다. 욕구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였다. (종종 자신의 감정대로 사는 것이 행복한 삶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을 볼 때 조금 슬퍼지기도 한다. 그것은 인간으로서 행복한 삶이라기보다는 동물로서의 행복한 삶이기 때문이다. 이 둘은 흔히 헷갈리기 쉬운 문제이다.)
사실 이것은 우리의 언어를 살펴보면 그 안에서도 잘 드러나고 있다. 우리는 종종 어떤 사람에게 ‘짐승 같은 놈’ 이라던가 ‘짐승만도 못한 놈’이라고 하는지 생각해보자. 자신의 욕구나 감정을 제어하지 못하고, 자신의 기분 내키는 대로 행동하는 사람들에 대해서 이야기 할 때 사용하는 언어였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이미 알고 있었다. 감정과 욕구를 컨트롤 하지 못한다는 것은 더 이상 인간으로서의 삶을 산다는 것이 아니라 동물로서의 삶을 살겠다고 천명하는 것과 다름이 없다는 것이다.
인간을 동물과 다르게 만드는 것은 결국 자신의 감정과 욕구를 이성으로서 컨트롤 할 수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인 것이다.
로봇-인간
인간과 로봇은 또 어떻게 다른가? 흔한 대답은 감정을 느끼느냐? 아니냐? 라고 한다. 하지만 감정을 느낀다, 혹은 감정을 따른다는 것은 로봇-인간의 문제라기보다는 로봇-동물 간의 문제이다. 그렇다면 로봇-인간의 문제는 무엇일까?
나는 로봇-인간의 문제는 어떤 행동을 함에 있어서 그 결정권이 누구에게 있느냐에 따른다고 생각한다.
여기 흥미로운 실험이 있다.
‘스키너의 심리상자’라는 유명한 실험이 있다. 동물(쥐나 비둘기 등)에게 지능이 있는지를 알아보기 위한 실험이었다. 그 실험에서 쥐나 비둘기들은 학습을 했고, 빨간 버튼을 누르면 먹이가 나온다는 것을 배우고, 계속 빨간 버튼을 눌렀다. 이런 비슷한 실험들이 있었다 라던가 그 결과에 대해서는 너무 유명하니 굳이 설명하지 않겠다. 그러나 그 실험의 결론에 대해서는 잘 모르는 것 같다. 그 성공적인 실험으로 스키너는 동물은 지능이 있다고 판단했을까? 그렇지 않다. 그의 결론은 ‘이 상자 안에 들어간다면 아인슈타인도 빨간 버튼을 누르는 것 말고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그래서 ‘동물에게 지능이 있는지는 알 수 없다.’였다. 그렇다면 이 상자 안에서 빨간 버튼을 누른다는 결정은 과연 누가 한 것인가? 그 상자 안에 있는 사람이? 아니면 그 상자를 만든 사람이?
로봇은 자신의 행동을 자신 스스로 결정하지 못한다. 로봇은 그저 누군가에 의해서 프로그래밍 되어있는 대로 움직일 뿐이다. 마치 스키너의 심리상자 안에 있는 비둘기처럼 말이다. 하지만 인간이라면 자신이 스스로 자신의 삶을 결정하고 판단할 수 있어야 한다. 만약 그렇지 못하다면 그는 그저 ‘바이오 머신’일 뿐이고, 그 머신이 하는 일은 ‘식품을 똥으로 만드는 일’인 것이다. 소위 ‘똥 만드는 기계’일 뿐인 거다. 이렇게 똥 만드는 기계로 사는 사람들을 알아보는 방법은 어렵지 않다. ‘어쩔 수 없다’ 혹은 ‘상황이 그렇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어쩔 수 없다’라는 말은 실제로는 ‘어쩔 수 있지만 어쩌지 않았다’는 의미이다. 자신의 행동의 결정을 ‘상황’이 했다는 의미이고 스스로는 어떤 판단도 하지 않았다는 의미이다. 판단을 하지 않는 다는 것은 책임도 지지 않는 다는 것이고 다시 말해서 책임을 회피하고자 자신을 ‘똥 만드는 기계’로 전락시키는 것이다.
종합해 보자면 인간으로서의 삶은 이런 것이다.
자신의 감정과 욕구를 자신의 이성으로 제어할 수 있으면서 자신의 모든 행동을 스스로 결정하고 자신이 책임지는 삶을 사는 것이다.
말은 쉽지만 사실 참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그렇게 살아야지 인간은 비로소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획득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타로마스터 최정안.
사람들은 보통 자신을 인간이라고 생각하고 사는 것 같다. 인간적이다, 혹은 인간성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곤 하며, 동물과는 다른 존엄을 가진 존재라는 인식들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하지만 정작 인간이란 무엇이며, 어떤 조건을 채웠을 때 동물과는 다른 인간이며, 동물과 인간이 실제로 어떻게 다른지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는 것 같다.
나는 동물-인간의 관계 이외에 인간-로봇의 관계를 하나 더 첨가함으로 오롯이 인간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그리고 어떻게 사는 것이 인간답게 사는 것인가에 대해서 정의를 해 보고자 한다.
동물-인간
동물과 인간의 차이는 무엇일까? 십 수 년간의 상담과 연구를 통해서 끝내 내가 도달한 결론은 인간과 동물은 실제로 그렇게 큰 차이를 가지지 않는 다는 것이었다. 다시 말해서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인간으로서의 삶 보다는 더 동물적인 삶을 살고 있다는 의미이다.
그렇다면 동물과 인간을 가르는 중요한 지점은 무엇일까? 그것에 대한 대답을 할 수 있어야 인간과 동물에 대해서 이야기를 할 수 있을 것이다.
흔한 주장은 보통 ‘언어’ 이다. 그러나 사실 여러 연구에 의해서 동물도 ‘언어’를 가진다는 것이 증명되었다. 다만 우리가 알아듣지 못할 뿐이다. (어떤 새들에게는 심지어 사투리까지 존재했다.)
그 다음은 ‘교육’과 ‘문화’였다. 하지만 이것 또한 유인원과 새들에게서 같이 존재한다는 것이 밝혀졌다.
그렇다면 인간과 동물을 가르는 가장 큰 차이는 무엇일까? 그것에 대한 대답은 자신의 ‘감정’(혹은 욕구)을 어떻게 컨트롤 할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동물에게서는 감정의 컨트롤을 볼 수 없었다. 그들은 자신의 감정의 흐름을 거스르지 않고, 자신이 원하는 것이 있으면 즉시 행동했으며, 분노나 슬픔 등을 그대로 표현했고, 그것은 바로 행동으로 이어졌다. 욕구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였다. (종종 자신의 감정대로 사는 것이 행복한 삶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을 볼 때 조금 슬퍼지기도 한다. 그것은 인간으로서 행복한 삶이라기보다는 동물로서의 행복한 삶이기 때문이다. 이 둘은 흔히 헷갈리기 쉬운 문제이다.)
사실 이것은 우리의 언어를 살펴보면 그 안에서도 잘 드러나고 있다. 우리는 종종 어떤 사람에게 ‘짐승 같은 놈’ 이라던가 ‘짐승만도 못한 놈’이라고 하는지 생각해보자. 자신의 욕구나 감정을 제어하지 못하고, 자신의 기분 내키는 대로 행동하는 사람들에 대해서 이야기 할 때 사용하는 언어였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이미 알고 있었다. 감정과 욕구를 컨트롤 하지 못한다는 것은 더 이상 인간으로서의 삶을 산다는 것이 아니라 동물로서의 삶을 살겠다고 천명하는 것과 다름이 없다는 것이다.
인간을 동물과 다르게 만드는 것은 결국 자신의 감정과 욕구를 이성으로서 컨트롤 할 수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인 것이다.
로봇-인간
인간과 로봇은 또 어떻게 다른가? 흔한 대답은 감정을 느끼느냐? 아니냐? 라고 한다. 하지만 감정을 느낀다, 혹은 감정을 따른다는 것은 로봇-인간의 문제라기보다는 로봇-동물 간의 문제이다. 그렇다면 로봇-인간의 문제는 무엇일까?
나는 로봇-인간의 문제는 어떤 행동을 함에 있어서 그 결정권이 누구에게 있느냐에 따른다고 생각한다.
여기 흥미로운 실험이 있다.
‘스키너의 심리상자’라는 유명한 실험이 있다. 동물(쥐나 비둘기 등)에게 지능이 있는지를 알아보기 위한 실험이었다. 그 실험에서 쥐나 비둘기들은 학습을 했고, 빨간 버튼을 누르면 먹이가 나온다는 것을 배우고, 계속 빨간 버튼을 눌렀다. 이런 비슷한 실험들이 있었다 라던가 그 결과에 대해서는 너무 유명하니 굳이 설명하지 않겠다. 그러나 그 실험의 결론에 대해서는 잘 모르는 것 같다. 그 성공적인 실험으로 스키너는 동물은 지능이 있다고 판단했을까? 그렇지 않다. 그의 결론은 ‘이 상자 안에 들어간다면 아인슈타인도 빨간 버튼을 누르는 것 말고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그래서 ‘동물에게 지능이 있는지는 알 수 없다.’였다. 그렇다면 이 상자 안에서 빨간 버튼을 누른다는 결정은 과연 누가 한 것인가? 그 상자 안에 있는 사람이? 아니면 그 상자를 만든 사람이?
로봇은 자신의 행동을 자신 스스로 결정하지 못한다. 로봇은 그저 누군가에 의해서 프로그래밍 되어있는 대로 움직일 뿐이다. 마치 스키너의 심리상자 안에 있는 비둘기처럼 말이다. 하지만 인간이라면 자신이 스스로 자신의 삶을 결정하고 판단할 수 있어야 한다. 만약 그렇지 못하다면 그는 그저 ‘바이오 머신’일 뿐이고, 그 머신이 하는 일은 ‘식품을 똥으로 만드는 일’인 것이다. 소위 ‘똥 만드는 기계’일 뿐인 거다. 이렇게 똥 만드는 기계로 사는 사람들을 알아보는 방법은 어렵지 않다. ‘어쩔 수 없다’ 혹은 ‘상황이 그렇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어쩔 수 없다’라는 말은 실제로는 ‘어쩔 수 있지만 어쩌지 않았다’는 의미이다. 자신의 행동의 결정을 ‘상황’이 했다는 의미이고 스스로는 어떤 판단도 하지 않았다는 의미이다. 판단을 하지 않는 다는 것은 책임도 지지 않는 다는 것이고 다시 말해서 책임을 회피하고자 자신을 ‘똥 만드는 기계’로 전락시키는 것이다.
종합해 보자면 인간으로서의 삶은 이런 것이다.
자신의 감정과 욕구를 자신의 이성으로 제어할 수 있으면서 자신의 모든 행동을 스스로 결정하고 자신이 책임지는 삶을 사는 것이다.
말은 쉽지만 사실 참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그렇게 살아야지 인간은 비로소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획득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타로마스터 최정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