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지구인이다. (FTA에 대해 생각해보자.)
사람들은 자신을 소개할때 '나는 어디 사람입니다' 라고 소개하는 경우가 많다. 이렇게 나는 누구입니다 라고 하는 것을 자신의 정체성(identification)이라고 한다. 자신을 가르키는 정체성은 원래 상당히 많다. 누구의 아들, 혹은 직업, 학위 등등등. 그런데 그 중에서 장소와 관련된 정체성에 대해서 이야기 하고자 한다. 예를 들어서 '나는 한국사람 입니다' 라던가 '나는 경상도 사람입니다'등이 그런 것이다.
이 정체성을 드러내는 이유는 두 가지이다. 하나는 나와 같은 사람인지를 확인하기 위해서, 다른 하나는 나와 다른 사람이라는 것을 확인하기 위해서이다. 정체성을 확인하고 나서 다른 사람이라고 생각되면 즉시 거리감을 두게 마련이 되고, 같은 사람이라면 둘 사이의 심리적 거리는 급속히 가까워 진다. 쉽게 말해서 동창이거나 동향의 사람들을 만나면 가깝다고 느끼는 것이 그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한 사람을 정의하는 정체성이 하나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은 '공간'에 한정한 정체성이라고 하더라도 마찬가지가 된다. 예를 들어 나는 주공아파트의 주민이며, 신림동민이고, 관악구민이고, 서울시민이고, 한국인인 것이다. 이렇게 다양한 정체성이 한 사람에게서 동시에 존재 하게된다.
그런데 이 정체성의 범위라는 것은 사실 시대적 배경과 함께 하기도 한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시간의 흐름에 따라 점점 넓은 영역을 자신의 정체성으로 흡수해 왔다는 것이다. 이동할 수 있는 거리와 정보의 이동시간등의 영향일 것이다. 조급 쉽게 이야기 하자면..
아주 옛날에는 자신의 정체성은 '윗마을 사람'과 '아랫마을 사람' 정도면 충분 했을 것이다. 그 너머에 누가 사는지 따위는 아무런 관심의 대상도 되지 못했을 것이니 말이다. 그러다 시간이 지나고 나면 '어느 마을 사람'이 생겨나고 또, '어느 도시사람' 정도의 정체성이 생겼을 것이다. 그리고 더 시간이 지나고 나면 '어느 도사람'이 생겨날 것이다. 지금도 경상도 사람이네 전라도 사람이네 어쩌네 하는 사람들을 생각해보자. 젊은 사람들 보다는 나이가 많은 사람들 중에 많을 것이다. 왜냐면 그들은 아직도 그 시대('어느 도 사람'이라는 정체성이 자신을 대변하는 시대)를 살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시간이 더 지나고 나면 '어느 나라 사람'이 생겨나게 된다. 아마도 지금 현대를 살고 있는 사람의 대부분은 '국가'를 자신의 정체성이라고 믿으며 살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만약 시간이 더 지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한번 생각해보면 재미있다. 국가를 넘어서는 더 큰 무엇인가가 있다는 의미가 될 테니까.
이런 생각을 했던 것이 나 만은 아니었던 듯 하다. 왜냐면 실제로 국가가 없어지고 있는 곳이 있으니까. 그곳이 바로 유럽이다. 유럽은 이제 사실상 서로 다른 국가라고 보기 힘든 형태로 발전되어 가고있다. 유럽 연합으로서 그 모습을 차차 만들어 가고 있다. 그리고 그보다 수백년 먼저 이런 형태를 만든 곳이 있다. 그곳이 바로 미국이다.
미국은 각 주 마다 주 법, 주 방위군, 주 경찰이 따로 있다. 사실상 하나의 국가들인 것이다. 그 국가들이 서로 협력하고 협조하며 살고 있는 것이다.
내가 이야기를 왜 하고 있냐면 FTA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이다.
FTA가 뭔지 가장 단순하게 이야기 하자면 국가간의 경제적 국경을 없애자는 이야기다. 다시 말해서 부산에서 서울 물건을 사면 관세가 없는데, 일본물건을 사면 왜 더 비싸야 하냐? 라는 단순한 이야기이다. 서울보다 일본이 더 가까운데 왜 일본 물건이 더 비싸야 하냐는 거다. 그게 FTA를 가장 쉽게 풀어 해석한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정체성으로 설명 했듯이 사실상 미래로 가는 당연한 수순인 것이다.
노무현 대통령이 '한국은 농업을 포기한다.' 라고 선언했었다. 당연한 이야기 아닌가?
앞으로 30년 뒤에 한국에서 농업을 하는 사람의 수는 얼마나 될까? 그리고 한국은 세계의 농업생산국가가 될 것인가? 전혀 그렇지 않다. 한국은 세계의 반도체 공장, 혹은 자동차 공장이 되는게 손쉬운 나라다. 최소한 농업 생산국가는 전혀 아닌 것이다. 그렇다면 FTA를 하면서 농업(쌀과 한우)를 지키자고 반도체와 자동차를 포기하는게 미래를 위한 투자일까? 농업개방 반대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정말 30년 뒤의 한국을 생각해본적 있는건지 아니면 당장 먹고살일에 눈 앞의 문제만을 생각하는 건지 다시 한 번 생각해볼 문제일 것이다.
농업개방이야기 하면 꼭 따라나오는 것이 있는데, 그것이 식량의 무기화 이야기 이다. 잘 생각해보자. 서울은 쌀농사를 더이상 하지 않는다. 하지만 아무도 서울에 쌀을 팔지 않을까봐 전전긍긍하지 않는다. 왜냐면 사먹을 돈이 있으니까. 전 세계가 한국만 왕따 시켜서 쌀을 안파는 상황이 올 거라고 생각하는가? 나폴레옹도 영국을 고립시키지 못했고, 미국도 쿠바와 북한을 고립시키지 못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돈이 있으면 누구나 판다. 그들이 걱장하는 일은 절대 일어나지 않는다.
우리는 미래로 가야 한다. 그리고 미래로 가고 있다. 한국이라는, 그리고 한국인이라는 정체성도 이제는 곧 구시대의 유물이 될 것이다. 그 증거로 단일민족국가라는 단어가 이미 교과서에서 사라졌다. 동양인, 아시아인, 그리고 더 나아가서 그냥 '지구인'이 되는 세상이 될 것이다. 과거에 정체성이 어떻게 변화되어 왔는지 생각해 보면 미래에 어떻게 될 것인지가 너무나 극명하다. 없어지고 있는 치즈를 후회하며 바라보지 말고 새 치즈를 찾아서 한 발 먼저 움직여 보자. 국적란에 '지구인'이라고 쓰는 것이 그 시작이 될 것이다.
타로마스터 최정안.
사람들은 자신을 소개할때 '나는 어디 사람입니다' 라고 소개하는 경우가 많다. 이렇게 나는 누구입니다 라고 하는 것을 자신의 정체성(identification)이라고 한다. 자신을 가르키는 정체성은 원래 상당히 많다. 누구의 아들, 혹은 직업, 학위 등등등. 그런데 그 중에서 장소와 관련된 정체성에 대해서 이야기 하고자 한다. 예를 들어서 '나는 한국사람 입니다' 라던가 '나는 경상도 사람입니다'등이 그런 것이다.
이 정체성을 드러내는 이유는 두 가지이다. 하나는 나와 같은 사람인지를 확인하기 위해서, 다른 하나는 나와 다른 사람이라는 것을 확인하기 위해서이다. 정체성을 확인하고 나서 다른 사람이라고 생각되면 즉시 거리감을 두게 마련이 되고, 같은 사람이라면 둘 사이의 심리적 거리는 급속히 가까워 진다. 쉽게 말해서 동창이거나 동향의 사람들을 만나면 가깝다고 느끼는 것이 그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한 사람을 정의하는 정체성이 하나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은 '공간'에 한정한 정체성이라고 하더라도 마찬가지가 된다. 예를 들어 나는 주공아파트의 주민이며, 신림동민이고, 관악구민이고, 서울시민이고, 한국인인 것이다. 이렇게 다양한 정체성이 한 사람에게서 동시에 존재 하게된다.
그런데 이 정체성의 범위라는 것은 사실 시대적 배경과 함께 하기도 한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시간의 흐름에 따라 점점 넓은 영역을 자신의 정체성으로 흡수해 왔다는 것이다. 이동할 수 있는 거리와 정보의 이동시간등의 영향일 것이다. 조급 쉽게 이야기 하자면..
아주 옛날에는 자신의 정체성은 '윗마을 사람'과 '아랫마을 사람' 정도면 충분 했을 것이다. 그 너머에 누가 사는지 따위는 아무런 관심의 대상도 되지 못했을 것이니 말이다. 그러다 시간이 지나고 나면 '어느 마을 사람'이 생겨나고 또, '어느 도시사람' 정도의 정체성이 생겼을 것이다. 그리고 더 시간이 지나고 나면 '어느 도사람'이 생겨날 것이다. 지금도 경상도 사람이네 전라도 사람이네 어쩌네 하는 사람들을 생각해보자. 젊은 사람들 보다는 나이가 많은 사람들 중에 많을 것이다. 왜냐면 그들은 아직도 그 시대('어느 도 사람'이라는 정체성이 자신을 대변하는 시대)를 살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시간이 더 지나고 나면 '어느 나라 사람'이 생겨나게 된다. 아마도 지금 현대를 살고 있는 사람의 대부분은 '국가'를 자신의 정체성이라고 믿으며 살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만약 시간이 더 지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한번 생각해보면 재미있다. 국가를 넘어서는 더 큰 무엇인가가 있다는 의미가 될 테니까.
이런 생각을 했던 것이 나 만은 아니었던 듯 하다. 왜냐면 실제로 국가가 없어지고 있는 곳이 있으니까. 그곳이 바로 유럽이다. 유럽은 이제 사실상 서로 다른 국가라고 보기 힘든 형태로 발전되어 가고있다. 유럽 연합으로서 그 모습을 차차 만들어 가고 있다. 그리고 그보다 수백년 먼저 이런 형태를 만든 곳이 있다. 그곳이 바로 미국이다.
미국은 각 주 마다 주 법, 주 방위군, 주 경찰이 따로 있다. 사실상 하나의 국가들인 것이다. 그 국가들이 서로 협력하고 협조하며 살고 있는 것이다.
내가 이야기를 왜 하고 있냐면 FTA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이다.
FTA가 뭔지 가장 단순하게 이야기 하자면 국가간의 경제적 국경을 없애자는 이야기다. 다시 말해서 부산에서 서울 물건을 사면 관세가 없는데, 일본물건을 사면 왜 더 비싸야 하냐? 라는 단순한 이야기이다. 서울보다 일본이 더 가까운데 왜 일본 물건이 더 비싸야 하냐는 거다. 그게 FTA를 가장 쉽게 풀어 해석한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정체성으로 설명 했듯이 사실상 미래로 가는 당연한 수순인 것이다.
노무현 대통령이 '한국은 농업을 포기한다.' 라고 선언했었다. 당연한 이야기 아닌가?
앞으로 30년 뒤에 한국에서 농업을 하는 사람의 수는 얼마나 될까? 그리고 한국은 세계의 농업생산국가가 될 것인가? 전혀 그렇지 않다. 한국은 세계의 반도체 공장, 혹은 자동차 공장이 되는게 손쉬운 나라다. 최소한 농업 생산국가는 전혀 아닌 것이다. 그렇다면 FTA를 하면서 농업(쌀과 한우)를 지키자고 반도체와 자동차를 포기하는게 미래를 위한 투자일까? 농업개방 반대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정말 30년 뒤의 한국을 생각해본적 있는건지 아니면 당장 먹고살일에 눈 앞의 문제만을 생각하는 건지 다시 한 번 생각해볼 문제일 것이다.
농업개방이야기 하면 꼭 따라나오는 것이 있는데, 그것이 식량의 무기화 이야기 이다. 잘 생각해보자. 서울은 쌀농사를 더이상 하지 않는다. 하지만 아무도 서울에 쌀을 팔지 않을까봐 전전긍긍하지 않는다. 왜냐면 사먹을 돈이 있으니까. 전 세계가 한국만 왕따 시켜서 쌀을 안파는 상황이 올 거라고 생각하는가? 나폴레옹도 영국을 고립시키지 못했고, 미국도 쿠바와 북한을 고립시키지 못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돈이 있으면 누구나 판다. 그들이 걱장하는 일은 절대 일어나지 않는다.
우리는 미래로 가야 한다. 그리고 미래로 가고 있다. 한국이라는, 그리고 한국인이라는 정체성도 이제는 곧 구시대의 유물이 될 것이다. 그 증거로 단일민족국가라는 단어가 이미 교과서에서 사라졌다. 동양인, 아시아인, 그리고 더 나아가서 그냥 '지구인'이 되는 세상이 될 것이다. 과거에 정체성이 어떻게 변화되어 왔는지 생각해 보면 미래에 어떻게 될 것인지가 너무나 극명하다. 없어지고 있는 치즈를 후회하며 바라보지 말고 새 치즈를 찾아서 한 발 먼저 움직여 보자. 국적란에 '지구인'이라고 쓰는 것이 그 시작이 될 것이다.
타로마스터 최정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