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하지만, 그래도, 그래서... 이 말의 뜻을 압니까?
뭐지? 농담하나? 국어만 20년을 가르쳐 온 나에게 접속어의 뜻을 물어보는 건가? 물으니 답하지요. 그런데는 전환 관계로 앞 말의 내용과 다른 새로운 화제가 등장할 때 연결하는 말, 하지만은 역접 관계로 어쩌고저쩌고~~
그날 처음 알았다. ‘그런데, 하지만, 그래도’는 패배자의 언어이고 ‘그래서’는 승자의 언어라는 걸.
타로를 배우기로 했다. 취미로 하는 거지만 이왕 배우는 거, 실력 있는 선생님한테 제대로 배우고 싶었다. 아는 동생의 소개로 선생님 수업을 등록하고 첫 수업을 시작하기 전 일종의 오리엔테이션이 있었다. 오리엔테이션이 시작된 지 딱 5분 만에 시쳇말로 멘붕, 그야말로 멘붕이었다. 뭐랄까? 단지 고정관념의 틀을 깬다가 아니라 내 의식 안에서 나도 모르게 일어나는 속임수를 본 것 같은 느낌. 알고 보니 참 얄팍한 속임수였는데 그걸 모르고 감쪽같이 속은 듯한 느낌. 진짜 초능력자라고 굳게 믿었던 유리겔라의 능력이 실은 매우 단순하거나 정교한 방법의 눈속임이었음을 알게 되었을 때와 같은 맹랑한 기분이었다.
본격적으로 시작된 수업은 내 관념의 틀을 깨는 작업의 연속이었다. 그 과정이 그리 편하지만은 않았다. 간혹 아~~하고 고개를 끄덕이게 되는 것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받아들이기 불편하고 인정하고 싶지 않은 것들이었다. 그것들을 받아들이고 인정하는 순간 이제까지 내가 옳다고 믿어왔던 것들은 한순간에 편견 덩어리에 불과해질 것이었다. 그렇게 불편한 수업이 진행되면서 조금씩 내 생각의 오류를 인정하게 되는 것도 있었고 여전히 받아들이기 힘든 것도 있었고 머리에선 이해가 되는데 가슴에선 받아들이지 못하는 딜레마에 빠지기도 했다. 그러면서 깨달은 하나는 내가 세상을 너무 한쪽 면만 보고 살아왔다는 사실이다. 접속어를 문법적, 사전적 의미로만 파악했듯이 말이다. 문법적, 사전적 의미가 아닌 삶의 관점에서 보면 전혀 새로운 의미가 펼쳐지듯, 생각의 프레임을 바꾸니 전혀 다른 세상이 보이기 시작했다. 특히 서운하고 화나고 슬프고 속상한 부정적 감정들이 누구 혹은 무엇 때문이 아닌 나 자신으로부터 비롯된다는 것을 이해하고 받아들이게 됐다. 그러면서 부정적인 감정이 일어날 때면 나의 무엇이 이런 마음을 일으켰지? 예전 같으면 주변에 탓을 돌렸을 텐데 지금은 내 자신을 자꾸 들여다보게 되었고, 이런 변화는 가족이나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 개선에도 영향을 미쳤다. 무엇보다 타로를 배우며 내가 알고 있는 게 정말 알고 있는가? 라는 질문을 던지게 된다. 나는 누구보다 나 자신을 인정하고 타인 또한 있는 그대로 인정할 줄 아는 사람이라고 자부해 왔다. 그러나 나는 자신을 인정한다는 게 어떤 건지, 어떻게 하는 것인지조차도 모르고 있었다. 타인에겐 나의 편견과 주관의 잣대를 들이밀며 난 다름을 인정할 줄 아는 진보적 인간이이라고 스스로 뿌듯해 했던 것이다. 돌이켜 보면 부끄럽기 짝이 없는 일이다. 그럼 이제는 완전하게, 진정으로 나 자신을 인정하고 받아들이게 되었을까? 물론 그건 아니다. 이제 겨우 나를 인정한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알게 되었고, 조금씩 적용하고 받아들이는 연습을 하고 있을 뿐이다. ‘마음도 근육과 같다.’ 자꾸 연습하고 단련하면 내 마음에도 언젠가 건강한 근육이 생길 거라고 믿는다.
마지막으로 여담이지만, 카카오스토리에서 ‘법륜스님의 희망편지’ 소식받기를 하고 있는데, 타로 수업을 들은 이후로 스님의 글이 하나 거슬리는 거 없이 너무 이해가 잘된다. 스님의 말씀과 수업 내용이 비슷한 게 참 많은 거 같다.
뭐지? 농담하나? 국어만 20년을 가르쳐 온 나에게 접속어의 뜻을 물어보는 건가? 물으니 답하지요. 그런데는 전환 관계로 앞 말의 내용과 다른 새로운 화제가 등장할 때 연결하는 말, 하지만은 역접 관계로 어쩌고저쩌고~~
그날 처음 알았다. ‘그런데, 하지만, 그래도’는 패배자의 언어이고 ‘그래서’는 승자의 언어라는 걸.
타로를 배우기로 했다. 취미로 하는 거지만 이왕 배우는 거, 실력 있는 선생님한테 제대로 배우고 싶었다. 아는 동생의 소개로 선생님 수업을 등록하고 첫 수업을 시작하기 전 일종의 오리엔테이션이 있었다. 오리엔테이션이 시작된 지 딱 5분 만에 시쳇말로 멘붕, 그야말로 멘붕이었다. 뭐랄까? 단지 고정관념의 틀을 깬다가 아니라 내 의식 안에서 나도 모르게 일어나는 속임수를 본 것 같은 느낌. 알고 보니 참 얄팍한 속임수였는데 그걸 모르고 감쪽같이 속은 듯한 느낌. 진짜 초능력자라고 굳게 믿었던 유리겔라의 능력이 실은 매우 단순하거나 정교한 방법의 눈속임이었음을 알게 되었을 때와 같은 맹랑한 기분이었다.
본격적으로 시작된 수업은 내 관념의 틀을 깨는 작업의 연속이었다. 그 과정이 그리 편하지만은 않았다. 간혹 아~~하고 고개를 끄덕이게 되는 것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받아들이기 불편하고 인정하고 싶지 않은 것들이었다. 그것들을 받아들이고 인정하는 순간 이제까지 내가 옳다고 믿어왔던 것들은 한순간에 편견 덩어리에 불과해질 것이었다. 그렇게 불편한 수업이 진행되면서 조금씩 내 생각의 오류를 인정하게 되는 것도 있었고 여전히 받아들이기 힘든 것도 있었고 머리에선 이해가 되는데 가슴에선 받아들이지 못하는 딜레마에 빠지기도 했다. 그러면서 깨달은 하나는 내가 세상을 너무 한쪽 면만 보고 살아왔다는 사실이다. 접속어를 문법적, 사전적 의미로만 파악했듯이 말이다. 문법적, 사전적 의미가 아닌 삶의 관점에서 보면 전혀 새로운 의미가 펼쳐지듯, 생각의 프레임을 바꾸니 전혀 다른 세상이 보이기 시작했다. 특히 서운하고 화나고 슬프고 속상한 부정적 감정들이 누구 혹은 무엇 때문이 아닌 나 자신으로부터 비롯된다는 것을 이해하고 받아들이게 됐다. 그러면서 부정적인 감정이 일어날 때면 나의 무엇이 이런 마음을 일으켰지? 예전 같으면 주변에 탓을 돌렸을 텐데 지금은 내 자신을 자꾸 들여다보게 되었고, 이런 변화는 가족이나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 개선에도 영향을 미쳤다. 무엇보다 타로를 배우며 내가 알고 있는 게 정말 알고 있는가? 라는 질문을 던지게 된다. 나는 누구보다 나 자신을 인정하고 타인 또한 있는 그대로 인정할 줄 아는 사람이라고 자부해 왔다. 그러나 나는 자신을 인정한다는 게 어떤 건지, 어떻게 하는 것인지조차도 모르고 있었다. 타인에겐 나의 편견과 주관의 잣대를 들이밀며 난 다름을 인정할 줄 아는 진보적 인간이이라고 스스로 뿌듯해 했던 것이다. 돌이켜 보면 부끄럽기 짝이 없는 일이다. 그럼 이제는 완전하게, 진정으로 나 자신을 인정하고 받아들이게 되었을까? 물론 그건 아니다. 이제 겨우 나를 인정한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알게 되었고, 조금씩 적용하고 받아들이는 연습을 하고 있을 뿐이다. ‘마음도 근육과 같다.’ 자꾸 연습하고 단련하면 내 마음에도 언젠가 건강한 근육이 생길 거라고 믿는다.
마지막으로 여담이지만, 카카오스토리에서 ‘법륜스님의 희망편지’ 소식받기를 하고 있는데, 타로 수업을 들은 이후로 스님의 글이 하나 거슬리는 거 없이 너무 이해가 잘된다. 스님의 말씀과 수업 내용이 비슷한 게 참 많은 거 같다.